Envy (엔비) - Rec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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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헤비니스의 새로운 스탠다드를 확립해나가는
전세계 유일무이의 포스트-하드코어-록 밴드
엔비(Envy)의 또 다른 위대한 한발자국. [Recitation]
기존에 작성했던 해설지에 몇 십번 썼던 얘기지만 암흑 속에서 뻗어나가는 한줄기 빛을 장중한 스케일로 그려내면서 격정적인 고양감과 감동을 주조해내는 방식은 어느덧 엔비(Envy)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리고 여러 인터뷰에서도 밝혔지만 폭발하는 감성과 노이즈 안에서도 결국 '인간미'가 그 중심에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 사실 바이오그라피라는게 크게 안바뀌고 뻔한건데 이 글에서 엔비를 처음 접하는 분들을 위해 이전에 적었던 사항들을 약간 수정해 재탕하겠다. 이미 다 아시는 분들이라면 스킵하시길.
1992년도에 전신이 되는 밴드 블라인드 저스티스(Blind Justice)로 시작했다. 그리고 1995년에 멤버들이 재정비되면서 이들은 '엔비(Envy)'라는 밴드명을 사용하게 된다. 4개의 정규작과 몇몇 EP들, 그리고 디스 머신 킬스(This Machine Kills), 엔디어보(Endeavor), 식스 펜스(Six Pence), 프랑스의 이스가리옷(Iscariote), 그리고 야펫 코토(Yaphet Kotto) 등과의 스플릿 앨범을 발표하면서 점차 세력을 굳혀나간다. 후덕한 인상의 시퀀서/보컬의 테츠야 후카가와, 멜로디의 뼈대를 만드는 기타리스트 노부카타 카와이, 주로 배킹/노이즈를 담당하고 있는 또 다른 기타 플레이어 마사히로 토비타-그의 와이프도 뮤지션이며 함께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베이시스트 마나부 나카가와, 그리고 진중한 드러머 다이로쿠 세키의 5인조로 구성되어 있는 엔비는 극한의 괴성과 감성적인 발라드를 본격적으로 교미 시키려는 시도를 보이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비슷한 밴드들은 많이 있어왔지만 지극히 독보적인 사운드를 분출하고 있다는 평을 이끌어 내면서 어느덧 중견의 위치에 접어들었다.
[Breathing and Dying in this Place] EP 발매 이후 데뷔작 [From Here to Eternity]를 1998년도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씬에 뛰어든다. 꾸준한 투어 이후 [Angel's Curse Whispered in the Edge of Despair], [Burning Out Memories], [The Eyes of a Single Eared Prophet] 등의 EP들을 1년에 하나씩 발표한다. 그리고 대망의 두 번째 정규앨범 [All the Footprints You've Ever Left and the Fear Expecting Ahead]를 2001년에 발표하면서 비로소 전세계를 휩쓴다. 미국에서는 스티브 아오키(Steve Aoki)의 딤 맥(Dim Mak)에서 발매됐으며, 2008년도에는 이후 미국 배급을 책임지는 템포러리 레지던스 리미티드(Temporary Residence Ltd)에서 새로운 디자인으로 재발매 되기도 했다.
2003년도 걸작 [A Dead Sinking Story] 또한 함께 다른 커버 디자인으로 재발매가 이뤄졌다. 참고로 템포러리 레지던스는 두 장의 과거 정규 작 이외에도 희귀트랙, 비정규 음원 모음집인 [Compiled Fragments 1997-2003]와 라이브 DVD [Transfovista] 등을 발표하면서 미국에 뒤늦게 이들의 족적을 정식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일본에서는 [All The Footprints You've Ever Left And The Fear Expecting Ahead] 앨범까지 H.G. 팩트(H.G. Fact)에서 발매하다가 [A Dead Sinking Story]부터 자신들이 주축이 된 손자이(Sonzai)에서 직접 유통하기 시작한다. 손자이는 자신들의 작품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내외 밴드의 앨범들 또한 릴리즈 하고있다.
2003년부터 영국 포스트 록씬의 수퍼스타 모과이(Mogwai)와 조우하면서 그들의 락 액션(Rock Action) 레코드에서 [A Dead Sinking Story]를 영국에 릴리즈하고 모과이의 일본투어 당시에는 함께 공연하기도 한다. 모과이의 스튜어트 브레이스웨이트(Stuart Braithwaite)는 "회오리와 같은 격렬함과 폭풍우가 내려 친 이후의 고요함과 같이 안타까운 양면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라이브 밴드"라며 엔비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보컬 테츠야는 모과이의 앨범 [Mr. Beast]에 수록된 [I Chose Horses]에 참여하기도 한다.
어느덧 초대형 페스티발로 입지를 굳히고 있는 올 투마로스 파티스(All Tomorrow's Parties)의 2004년도 공연에 초대되며 이후 영국 투어를 실시하기도 했다. 헤비니스 씬의 한 획을 긋고있는 아이시스(Isis)와 투어를 다니기도 했으며 2005년 6월에는 프랑스의 [Furyfest]에 출연하면서 서서히 유럽으로 영역을 넓혀간다. 유럽과 미국 이외에도 한국, 홍콩, 대만에서 투어를 펼치면서 아시아 지역의 팬들을 직접 만나게 된다.
2006년, 그들의 최대 히트작 [Insomniac Doze]를 발표하면서 국제적인 반열에 올라선다. 포스트 록, 슈게이징에 열광하던 리스너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앨범의 큰 성공에 힘입어 끊임없는 대형 페스티발에 섭외됐으며, 미국의 레이블 메이트인 모노(Mono) 라던가 익스플로전스 인 더 스카이(Explosions In The Sky)와 함께 미국과 유럽등지에서 공연하는 경우가 많았다. 2008년도 여름,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메탈 페스티발인 헬페스트(Hellfest) 당시에는 슬레이어(Slayer)와 같은 시간대에 반대편 무대의 헤드라이너로 서면서 현재 유럽에서 그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 인지를 가늠케 했다.
메이저 아일랜드(Island)에서 발매한 두 장 이후 준 메이저인 명문 안티/에피타프(Anti/Epitaph)로 적을 옮긴-아일랜드에서 안티로 간 경우는 톰 웨이츠(Tom Waits)의 예가 있다.- 뉴 저지가 자랑하는 이모/스크리모 군단 써쓰데이(Thursday)와의 스플릿에서는 두 밴드 모두 신/구를 포함한 모든 팬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네이팜 데쓰(Napalm Death)의 초대 기타리스트이자 갓플레쉬(Godflesh)의 멤버였던 저스틴 K 브로드릭(Justin K. Broadrick)의 밴드 제수(Jesu)와의 스플릿에서도 주옥같은 엔비만의 사운드를 들려줬다. 드론과 슈게이징 사이에 있는 제수의 경우 스플릿에서 밴드의 곡이 아닌 일렉트로닉한 소스들로 이루어진 곡들을 담아냈고 엔비의 경우 [Life Caught In The Rain]에서 '팝'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후 작품의 방향을 예상케끔 만들었다. 2009년 이들과 밥을 먹을 무렵 이 두 스플릿 앨범에서 한 곡씩 팝 스타일을 가진 곡들이 있었는데-'팝 스타일'이라는 표현은 이들이 지칭한 것이다-, 다음 앨범에서 이런 멜로우한 멜로디들을 적극 수용할거냐고 물었을 때는 아직 확실히 정해진 것이 없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10년간의 활동을 정리한 영상들을 담아낸 DVD [Transfovista]에서는 무대의 크기를 불문하고 작렬하는 퍼포먼스가 압권이라 할만했다. 누군가는 이 영상을 두고 120분간의 휴먼 다큐멘타리라고 까지 말하기도 했다. 더욱 포스트 록에 가까워진 [Abyssal] EP를 2007년도에 발매하면서 팬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기도 한다.
발매했던 정규 앨범들은 일본 내에서만 1만장 이상을 팔면서 인디, 특히 하드코어 씬에서는 전례가 없는 세일즈를 보여주기도 했다. [Further Ahead of Warp]의 경우에는 시세이도(Shiseido)의 립스틱 마끼야쥬(MAQUillAGE)의 CF에 BGM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일본과 영미권의 다채로운 아티스트들과 공동으로 공연/작업하면서 메이저와 인디의 중간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 광범위한 활동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이모셔널 하드코어, 포스트-하드코어, 스크리모 등으로 분류되곤 하지만 몇 해 전부터는 포스트 록의 연장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이들의 유튜브 동영상에 있는 베플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이모, 스크리모, 포스트 하드코어, 혹은 가스펠-코어 같은 말 따위를 누가 신경이나 쓸까? 이건 그냥 죽이는 음악이다. 그리고 그게 중요한 거고."
■ Recitation
[Insomniac Doze]이후 정규앨범으로는 약 4년 반 만인 9월 22일 일본 발매가 이루어졌다. 4년이란 긴 시간이 지났지만 앞에 언급했던 스플릿 앨범들과 DVD, 그리고 EP를 통해 텀이 길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정규앨범이기 때문에 그 무게의 체감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엔비의 미국과 영국의 레이블들인 템포러리 레지던스와 락 액션에서 여전히 릴리즈 되며 말레이시아와 대만, 홍콩, 그리고 지금 당신이 이 글을 보고 있듯 한국에서도 발매가 이루어졌다. 참고로 바이닐 레코드의 경우 초판 500매가 컬러 바이닐로 제작됐다고 하니 참고하시길. 미국과 캐나다 투어 이후, 11월부터는 일본에서 투어를 하고 내년에는 아시아와 유럽투어가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오사카, 나고야, 도쿄의 공연에서는 게스트 없이 단독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앨범의 제목은 '낭독, '낭송'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이야기'에 치중하려는 듯 보이는 첫인상을 준다. 하지만 가사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것은 뭔가 대단한 스토리라기 보다는 일상의 고뇌, 그리고 인간의 감정을 탐구하는 인생에 대한 일종의 송시(頌詩)에 가깝다. 이전 모과이의 [Mr. Beast] 앨범에 수록된 [I Chose Horses]에서 자신의 '시'를 읊어준 일이 있었던 테츠야 후카가와 이기에 이 제목이 딱히 낯설지만도 않다.
게다가 앨범의 처음과 끝 또한 묘령의 여인의 낭송으로 이루어져있다. 엔비의 앨범에서 차분한 여자의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충격적인 일인데 이 '묘령의 여인'은 한국의 일드 매니아들에게도 익숙한 얼굴인 오쿠누키 카오루(?貫?)로, 그녀는 배우 커리어 뿐만 아니라 여러 TV 프로그램과 나레이터로도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녀는 앨범에 수록된 [Worn Heels And The Hands We Hold]의 뮤직 비디오에서도 비까지 맞아 가며 열연했다. 네이버 인물정보에 의하면 88년도에는 엔젤스라는 그룹의 멤버이기도 했다는데,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엔비의 격렬하고 아름다운 세계로의 인도-[Guidance]-를 부추기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이번 앨범에 참여한 오쿠누키 카오루의 인터뷰가 qetic.jp에 실렸다. 엔비로서는 이례적인 경우인지라 몇몇 부분들을 옮겨볼까 한다.
"NHK의 특별 프로그램을 통해 엔비와 '하드코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으며, 곧바로 CD를 사고 라이브를 보러 갔다. 나의 마음이 무엇에 반응하고 있었는지를 분명히 알았다. 엔비의 연주는 절실하고 격렬함 안에 상냥함과 섬세함이 있었으며, 모든 것을 감싸는 힘 또한 지녔다. 엔비의 음악, 그들의 인생 그 자체에서 감동 받았던 것 같다. 기타의 프레이즈는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고, 이는 듣는 사람의 마음에 러브레터와 같이 닿고 있었다.
시부야의 O-East에 캣 파워(Cat Power)의 라이브를 보러갔을 때 우연히 엔비의 멤버를 만나고 악수를 했다. 그리고 수개월 후 나의 매니저먼트 오피스에 그들로부터 새 앨범에 여성의 시 낭독을 넣고 싶은데 참여할 수 있겠냐는 편지가 도착됐다. 무척 놀라웠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꼭 참여시켜 달라는 답장을 했지만 정말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세계관을 부숴버리지는 않을까 불안해 하기도 했다. 편지를 받았던 시기는 레코딩 이전이었고 그 사이에 곡의 이미지, 그리고 시의 이미지를 교환하고 스튜디오를 방문했는데, 평상시 나의 일과와는 다른 형태의 창작이 즐거웠다.
참여하게 될 두 곡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전생의 기억'의 세계를 가진 따뜻하고 편안한 기분을 느꼈고 이 두 곡이 뫼비우스의 고리와 같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레코딩 당일에는 '자유롭게 해보라'는 얘길 들었는데, 평상시 여러 제약과 지시가 있는 가운데에 표현하는 일을 해왔던 나한테 '자유롭게 해보라'는 것은 약간 당황스러운 주문이었지만 헤드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에 마음을 맡겨보기로 했다.
그리고 완성된 음원을 들었을 때는 그 장대함에 압도됐다.
매우 치밀한 사운드 메이킹임에도 불구하고 충동적인 에너지 또한 소용돌이치고 있었는데, 정말로 근사했다. 작품 안에 나의 소리, 나의 현재가 새겨진 것이 기뻤고 하나의 액션이 이렇게 멋진 사건으로 연결된 것은 용기로 작용했다. 엔비의 세계에 직접적으로 접한 것은 나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시켜줬고, 앞으로의 일, 그리고 인생이 점점 흥미로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쿠누키 카오루의 낭송을 담은 [Guidance]를 시작으로 물의 표면에서 점점 침잠해 들어가는 [Last Hours of Eternity]가 이어진다. 4분 여가 지난 후에야 보컬과 울부짖는 기타가 등장하지만 이는 엄청나게 컴프레스되어 있는 상태라 기존 이들의 앨범처럼 시원하게 터져주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효과는 점점 더 물밑아래로 깊숙히 잠겨 들어가는 형태를 묘사해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이 세계관은 진정 잠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제수와의 스플릿 앨범에서 볼 수 있는 미드템포의 비트와 모던한 기타리프가 함께하고 있는 [Rain Clouds Running in a Holy Night]의 경우 몇몇 기타 멜로디가 친숙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역시 모던록에서나 볼법한 멜로디와 전개가 간간히 비춰지는 [Pieces of the Moon I Weaved], 전작의 [Scene]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서정미 넘치는 왈츠 풍의 아르페지오가 점점 드라마를 갖춰나가는 [Light and Solitude], 그리고 두 대의 기타가 80's 일본 록밴드들 특유의 리프를 스피디하게 연주해낸 [Dreams Coming To An End] 등의 곡들은 분명 전작들과의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Dreams Coming to an End]의 경우에는 앨범이 공개되기 이전에 이들의 마이스페이스 페이지에서 미리 들어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어쿠스틱 기타로만 연주된 [Incomplete]는 앨범의 쉼표같은 역할을 한다. 노래 제목이 '미완성'인데 후에 이것이 새롭게 밴드 스코어의 형태로 프로그래스 될런지는 두고봐야 하겠다.
딜레이가 걸린 트레몰로 주법이 다시금 부활한다. 트레몰로 주법을 바탕으로 서서히 비장하게 비상하는 [Worn Heels and the Hands We Hold], 이번에는 또 트레몰로 이펙터가 기타의 울림을 더하는 감상적인 4분 여의 초반부와 이후 물밀듯 터져 나오는 스네어 롤링이 인상적인 [A Hint and the Incapacity], 컨템프러리한 록의 화법과 하드코어를 접붙임하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창백한 서정미의 질주를 담아낸 [A Breath Clad in Happiness]가 앨범의 성격을 드러낸다. 흑/백, 그리고 고/저가 분명하고 느리고 낮게 한걸음씩 전진해 나가는 [0 and 1], 끝으로 다시 한번 오쿠누키 카오루의 낭송으로 전개되는 [Your Hand]를 통해 수미쌍관의 형태로 앨범이 종결된다. 이 구조는 앨범의 부클릿을 보아도 알 수 있는데, 크레딧과 오쿠누키 카오루가 참여한 부분의 가사가 인쇄되어 있는 부분은 회색으로, 그리고 그 중간은 모조리 검은색 페이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앨범 커버사진의 검은 하늘과 회색의 대지와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땅에서 시작해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땅으로 돌아오는 전개인 셈이다.
표면적인 첫 인상은 일단 전체적으로 보컬의 '낭송' 속도가 빨라졌고 기타 레코딩의 경우 두 대의 소리를 양쪽으로 무척 명확하게 분리해놓았다. 80년대 후반의 파워 발라드를 연상시킨다는 글이 보도자료에도 적혀있는데, 드라마에 집중해 파고들어가기 보다는 다양한 접목의 시도가 일단은 눈에 띈다. 물론 그 와중 자신들의 색깔을 놓지 않으려는 의도의 톤이나 그들 취향의 멜로디 또한 감지할 수 있다.
앨범의 곡 제목과 가사내용에 유독 '비'에 관한 얘기들이 간간히 눈에 띈다. 개인적인 이야기 이다만 이들이 2009년도에 한국에 왔을 당시 공연이 끝나고 뭐좀 먹고 걸어서 호텔에 들어갈 무렵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멤버들은 그냥 비를 맞고 다녔는데, 한국에서의 이날이 자신들의 이번 투어 마지막 공연지 였으며, 투어 당시 단 한번도 비가 내린적이 없었다고 한다. 마지막 날 모든 일정이 끝나고 호텔에 들어갈 무렵 비가 오니깐 뭔가 좀 그럴싸해보였다. 좀 감성돋는 얘기긴 한데, 이 앨범을 듣는 사람들한테 이런 경험의 공유가 곁다리로 작용하지 않을까 해서 일단은 끄적여 본다.
"이 시적인 노래는 변화에 대한 희망이다." - [0 and 1] 中.
아무튼 본 작을 통해 신기하게도 이들은 다시 한번 새로운 국면에 도달하게 됐다. 여전히 격렬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이번 앨범의 경우 격렬함 보다는 아름다움으로 무게추가 더 기우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이전의 스플릿에서 이미 감지할 수 있었던 부분이기도 했다. 장엄한 '아름다움'은 좀 더 세밀한 여성취향의 '미'적 감각으로 변화됐다. 이는 꼭 인트로 나레이션에 여성의 목소리를 삽입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현란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무겁고 빠른 다른 여타 하드코어 밴드들하고는 차별화 되는 지점에서 더욱 멀리 가려 하고있다. 고뇌를 담은 지적인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는 여느 진지한 아티스트들 보다도 굳건하다.
사실 하드코어의 서브컬쳐 중 하나인 스트레잇 엣지(Straight Edge) 정신은 금욕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만 어느덧 이것은 사상이나 정신의 문제가 아니라 'X'사인 같은 것이 단순한 패션 아이콘의 성질로 변질되곤 했다. 물론 하드코어 아래에 여러 서브컬쳐가 존재하지만, '정신'적인 부분의 고뇌와 금욕적인 면에서는 엔비의 경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듯 싶다. 참고로 한상철도 술, 담배, 마약을 하지 않아 스트레잇 엣지로 분류되곤 한다.
누군가는 테츠야의 목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사실 목을 무리하게 사용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염려가 되는 부분이긴 한데, 사실 나는 메탈 특유의 파워풀한 괴성 보다는 점점 인간의 절규에 닿게 하려는 의도에 의해 선택된 창법의 변화이지 않은가 싶다. 이는 소리의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곡, 그리고 가사의 성격에 부합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Insominiac Doze] 이후 특유의 공격적인 성향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던 팬들도 있었지만 결국 또 다른 청중들을 얻게됐다. 게다가 이번앨범은 하드코어와 관련이 없는 음악 팬들을 더욱 광범위하게 끌어안을 수 있는 형태 또한 갖추고있다. 멜로디는 여느 앨범들보다도 빛난다. 누군가는 이를 여러가지 의미에서 '팝'으로 분류할 수도 있을것 같다. 초기 앨범에서 볼 수 있었던 속전속결의 돌진 또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위에는 유한 멜로디가 얹혀져 있다. 긍정적인 멜로디들은 서서히 격렬해져 간다. 몇몇 메이저 코드의 곡들은 썰스데이의 곡들을 연상케 만들기도 한다. 아무튼 지금까지는 없었던 사례를 다시한번 성공적으로 일궈냈다. 우회를 거듭하면서 결국 록팬들 앞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자신들이 획일화 시켜낸 장르에 대한 진화 또한 이들 스스로가 책임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실로 엔비는 그 '변화'를 성공적으로 실현해냈다. 비슷한 음악은 일본 뿐만 아니라 전세계 각지에 있겠지만 자신들만의 확고한 바운더리를 구축해내면서 또 다른 카테고리를 하나 더 설정해내는 대업을 한번 더 달성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엔비는 현재 자신들의 몫을 충분히 해낸 셈이다. 물론 이런 '의무감'을 무색하게 만드는 좋은 곡들로 무장하고 있는 앨범이다.
앨범의 커버처럼 흑과 백, 그리고 하늘과 땅,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회색의 빛을 발광하고 있다. 이 '격정'은 비로소 다채로운 감정을 부여받게 됐다. 변함없는 독특한 세계관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쓸쓸한 가을, 그리고 긴 겨울 밤을 함께할 앨범이다.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호소하는 음악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무슨 감정이든 느끼게 될 것이다.
- 한상철(불싸조 http://twitter.com/bullssazo)